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벌지 전투 (문단 편집) === 독일군의 공세 실패, [[보텐플라테 작전]] === 1945년 1월 1일 독일군은 [[루프트바페|공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다시 한번 공세를 가하여 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터프하기로 유명한 [[조지 S. 패튼|조지 패튼]]조차 1월 4일자 전쟁 일기에서 '우리는 여전히 지고 있다.' 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원래는 미군의 공격을 선도해야 할 제6기갑사단이 [[발터 모델]] 특유의 '재편성 후 반격'에 휘말려 패퇴하자 패튼은 '독일인은 우리보다 더 춥고 굶주렸지만, 더 잘 싸우고 있다.' 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압도적인 항공력에 밀린 이상, 독일군은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본래 독일 공군의 공세 작전은 육군의 최초 공세에 맞추어 동시에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연료의 확보와 항공기의 정비 및 보충, 그리고 날씨 문제로 인해 계속 연기하다가 겨우 시작한 것. 이러한 독일 공군의 사실상 마지막 공세는 [[보텐플라테 작전]]이라고 하며, 초반 기습으로 300여 대 이상의 연합군 항공기를 지상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아군인 독일 방공 부대의 대공 사격 등에 의해 [[팀킬|오인 사격을 당했다.]] 이 문제가 더욱 심각했던 건 기습 효과를 노리느라 공습 정보를 지상군 부대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 전부 못 받은 건 아니고 몇몇 부대는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상황을 업데이트해 주지 않았기에 여기도 연합군으로 판단하고 쏴 댔다. 게다가 연합군을 속이려고 일부러 항로를 V2 발사대 등 방공망이 촘촘한 지역만 골라서 짰던 것도 있다. 덕분에 독일군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숙련된 조종사와 항공기들을 상당수 날려먹었다. 반면, 연합군 입장에서는 대다수가 지상에서 격파된 것이라 조종사 같은 고급 인명 피해는 독일군에 비하면 없다시피 했다.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영국 공군 주둔지처럼 정예 부대가 투입되어 공습에 성공한 부대가 이런 상황인데, Asch(Y-29)같이 연합군 에이스가 발생한 곳이 있다. 이 공세 이후 독일 공군은 이러한 정규 작전을 다시는 행하지 못하였다. 당시 서부전선의 독일군 전투기 사령관이었던 [[아돌프 갈란트]] 중장은 이 공세가 끝난 직후 '보텐플라테는 [[루프트바페]]의 묘비명이 되었다.'고 발언했을 정도였다. 이후의 독일 공군은 공군 전체 차원의 체계적인 작전이 아닌 각 비행 기지 및 비행단의 간헐적인 개별 전투만 행하다가 종전을 맞게 된다. 게다가 아이젠하워 장군 역시 재빠른 대처를 보이면서 독일군의 공세가 둔화되었다. 그리고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와 패튼 장군이 돌출부 북쪽과 남쪽에서 반격을 시작하자 물자 부족 등의 문제가 겹친 독일군은 공세를 중지하였다. 독일군 사령부는 1월 7일 다시 한번 히틀러에게 병력 철수를 건의하였고, 더 이상 공세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현실을 수용한 히틀러가 철수안을 수락하면서 독일군이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철수를 하는 동안에도 추격하는 연합군으로부터 피해를 입었고, 각지에 고립된 연합군 부대와 독일군 부대가 마구 뒤섞인 까닭에 전투는 1월 27일 마무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